야사와 괴담으로 읽는 조선시대 : 책&생각 : 문화 : 뉴스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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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리냐노는 조선을 일본의 한 지방으로 인식하는지, ‘동쪽’을 의미하는 오리엔탈레스(Orientales)를 대문자로 명기하여 단순한 지방이 아니라 별개의 지방 혹은 나라로 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더욱이 일본과는 상당히 다른 상이한 점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조선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수마리오를 작성할 때까지만 해도 그는 조선에 대한 인식이 그리 깊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발리냐노는 두 번째 일본 방문에서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는 것을 보았고, 그것은 모두 히데요시의 야심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것에 대해 발리냐노는 1592년 총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히데요시는 벌써 조선국을 정복했습니다. 오로지 그(히데요시)의 정복욕에 의한 것입니다.”58)고 하였다.


조선은 대규모 운송을 수운에 의지하였고 주요 운송수단은 조운선이었다. 육로는 9-10 개의 간선 도로가 있었고 역참을 두어 국가의 통신에 사용하였다. ‘시제’는 5대 이상의 조상을 해마다 음력 3월이나 10월 중에 날을 택하여 지내는 제사예요.


16~17세기를 큰마마(천연두)의 시대라 한다면 18세기는 작은마마(홍역)의 시대라 부를만 했다. 18세기 경상도의 고성에 살았던 구상덕은 1732년 한 해를 회상하면서 세 가지 역병이 한꺼번에 유행한데가 기근만저 심해 죽은 사람들을 셀 수 조차 없다고 기록했다. 조선시대의 초상화를 보면 어려서 홍역이나 두창을 앓은 흔적이 얼굴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사례들을 상당수 발견할 수 있다. 그럼, 이번에는 풍속화의 등장에 기여한 화가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죠.


이에 따라 조선시대의 풍속화를 1392년부터 16세기까지의 전기와 17세기부터 1910년까지의 후기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공민왕(恭愍王)이 그린 것으로 전하는 <수렵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는 원래 두루마리 그림이었던 것이 누군가에 의하여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졌다. 호복(胡服)의 복장에 변발(辮髮)을 한 인물이 말을 타고 달리거나 활시위을 당기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즉, 무사가 대문을 지키고 시위들이 철퇴와 검을 가지고 뜰을 지키며 노복들이 둘러서서 시중을 들며 악사들이 노래와 연주로 즐겁게 하는 모습이다.


이와 같이 특정 시대나 시인에 대한 품평은 이 작품의 주제 형성과 분위기 조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대 풍격을 비교해 보면 당시(唐詩)와 송시(宋詩)의 차이는 대단히 분명하다. 안평대군은 “한 줄기 푸른 구름이 궁중의 나무에서 일어나 성벽 꼭대기를 둘러싸기도 하고, 또 산기슭으로 날아가기도 하였다”29라는 시제를 주고 10명의 궁녀들에게 시를 짓게 한 후 세 번에 걸쳐 평을 한다. 처음에는 전체 작품을 한 번에 살펴보고, 두 번째로 여러 차례 ‘읊어보고(吟詠)’, 세 번째로 ‘천천히 궁구(翫繹)’한다. 첫 번째는 종합적인 인상을 표현하고, 두 번째는 음률과 격조 등과 같은 전체적인 미감을 평가하고, 세 번째는 거기 담긴 뜻을 음미한 것이다.


문장이 뛰어난 ‘거벽’은 출제자의 의도에 따라 답안의 내용을 전문으로 지어주는 역할입니다. ‘사수’는 거벽이 지어준 문장의 글씨를 빨리, 잘 대신 써주는 사람입니다. ‘거벽’이 책가방에 숨겨온 예상답안지나 참고서를 꺼내 일필휘지로 답안을 지어내면 ‘사수’는 촌각의 지체없이 글씨를 써서 제출했습니다. 앞서 정조 때 치른 특별과거에서 21만명이 넘는 수험생이 응시해서 제출한 답안지가 7만여장이라 했죠.


궁중의 공식적인 모임인 계회도와 더불어 민간의 모임인 시회도(詩會圖)의 유행도 또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였다. 이들 판화는 궁중에서 백성들을 유교적인 덕목으로 교화시키기 위하여 제작한 고사 인물화이자 풍속화이다. 안견(安堅)이 밑그림을 그린 ≪삼강행실도≫는 한 화면에 1∼7장면의 설화의 내용을 배치하는 다원적 구성 방식을 취하였다. 다만 불화 중의 풍속 표현은 핵심 주제가 아니고 부차적인 소재로서 그려졌다. <미륵하생경변상도 彌勒下生經變相圖>(일본 知恩院 및 親王院 소장)에는 하단에 조그맣게 배치된 밭 가는 장면과 추수하는 장면에서 풍속화의 경향을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커피 애호가로 알려진 고종 황제는 커피와 함께 ‘와플(Waffle)’을 즐겨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와플은 밀가루, 달걀, 우유 등의 재료를 반죽해 전용 팬에 부어 구워 먹는 디저트다. 유럽에서 즐겨 먹었고 프랑스와 벨기에, 네덜란드 등이 와플의 본고장으로 불린다. 개항 이후 조계지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증가하는 사이 한국에서도 새로운 삶을 찾아 이민을 하는 일이 생겼다.


우선 건축에 관한 일로 궁궐 영건・관공서의 청사나 가옥 짓기・토목공사・하천준설 등의 일이 해당하는 업무인데, 공조의 속사(屬司)인 영조사와 속아문인 선공감에서 주로 맡아서 하였다. 각종 공예품을 만들고 금・은・옥 등의 귀금속을 세공하거나 도자기와 기와를 만드는 일도 공조의 업무였고, 이는 공조의 속사인 공야사와 속아문인 와서에서 맡았다. 공조의 속아문인 상의원에서는 이렇게 만들어진 공예품 및 일용품을 궁궐에 공급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산림과 천택을 관리하고 산림에서 나는 목재와 석재 등으로 생활용품과 국가에서 소용되는 물품을 만드는 일을 관리하는 일도 공조 담당이었다. 나루터・교량・선박・수레・목탄・문방구 등을 만들고 궁궐의 정원에 필요한 꽃나무 등을 공급하였다. 그 밖에 공조의 속아문인 전연서는 궐내의 청소와 전각 수리보수, 수성금화사는 궐 내부와 관청・도성 안의 소방, 장원서와 조지서에서는 국가의 각종 공문서에 쓰이는 종이를 만들고 관리하는 일을 하였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계속된 환도 요청에 선조는 1593년(선조 26) 9월 7일 양위 의사를 밝혔다가 승정원의 만류와 9월 21일 의정부좌의정 윤두수의 만류로 철회하였다. 1593년(선조 26) 8월 의주에서 몇차례 남하하여 평양성을 거쳐서 해주까지 왔다가 다시 의주 근처로 올라가는 일을 반복하였다. 각 총기는 소기 5명을 지휘하고 각 소기는 병사 10명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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